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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과천지식정보타운의 기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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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Gemini를 활용한 소설입니다. ^^

 

📚 『과천지식정보타운의 기술자들』 최종 목차

프롤로그: 다섯 시 반의 오피스 (5p)

1부. 오래된 넥타이와 새로운 출근길 (75p)

  ├ 1장. 김 부장, 광동제약을 만나다 (25p)

  ├ 2장. SAP S/4HANA와 중견기업 문화의 충돌 (20p)

  └ 3장. 과천 지식정보타운, 점심 식당의 생존 전략 (30p)

2부. 유쾌한 보고서 지옥의 나날 (100p)

  ├ 4장. 20대 PM과의 스크럼 회의 (세대 차이) (25p)

  ├ 5장. '꼰대'와 '요즘 애들' 사이, 탕비실의 공감대 (25p)

  ├ 6장.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 벼랑 끝의 컨설턴트 (25p)

  └ 7장. 일과 삶, 밸런스 버튼을 찾아서 (25p)

3부. 7개월간의 일상, 힐링으로 승화되다 (60p)

  ├ 8장. 최종 오픈 D-7, 예산과 시간의 압박 (20p)

  ├ 9장. '기술자'의 의미, 내가 해왔던 일들의 가치 (20p)

  └ 10장. 광동제약 프로젝트를 마치고: 다음 출근길 (20p)

에필로그: 다시, 나만의 자리로 (10p)

 


프롤로그: 다섯 시 반의 오피스

과천 지식정보타운 5단지에 위치한 광동제약 신사옥은 새벽 다섯 시 반에도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유리와 철골로만 이루어진 건물은 차라리 거대한 투명 냉장고처럼 보였다. 그리고 김현수 부장, 그는 그 냉장고 안에서 7개월째 냉동된 채 살고 있었다.

오늘이 그 냉동 생활을 끝내는 날이다. SAP S/4HANA ERP 고도화 프로젝트의 최종 ‘Go-Live’(가동 시작).

김현수 부장은 낡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자동문에 체크카드를 갖다 댔다. ‘삑.’ 짧은 전자음이 고요한 새벽을 찢었다. 지정타에 입주한 지식산업센터 건물의 로비는 아직 어둠이 덜 걷힌 것처럼 침묵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20층 버튼을 눌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오십 대 중반의 얼굴, 깊게 패인 미간 주름, 그리고 넥타이. 그의 넥타이는 20년 전 입사 초기에 산 것이다. 굵고 어딘가 모르게 촌스러운 체크무늬. 이걸 매고 오면 젊은 PM 이세아가 늘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곤 했다. 김 부장은 그걸 아는데도 고집스럽게 이 넥타이를 맨다. 이건 그의 일종의 정체성 같은 것이었다. 20년 넘게 이 바닥, 이 시스템 안에서 굴러온 '기술자'의 훈장이라고나 할까.

“뭐, 어때. 시스템만 잘 돌아가면 되는 거지. 넥타이가 시스템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빨리 올라가서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간밤에 혹시나 Cut-over Plan(시스템 이관 계획) 중에 이상한 변수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지난 7개월간 밤잠을 설쳐가며 쌓아 올린 수백 기가바이트의 데이터와 수천 개의 설정 값들이, 오늘 아침 단 한 번의 에러로 무너지지는 않을까. 김 부장은 이미 겪을 만큼 겪은 베테랑이었지만, 'Go-Live' 직전의 이 쫄깃함은 몇 번을 경험해도 사라지지 않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경력이 쌓일수록 더 무서워졌다. 벼랑 끝에서 시스템을 여는 기분이었다.

20층에 도착했다. 프로젝트 룸의 철문 앞은 이미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세아 PM이 벌써 와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문고리를 잡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들숨, 날숨.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커피 향과 함께 찬 공기가 훅 끼쳐 왔다.

“부장님, 벌써 오셨네요.”

이세아 PM이 말했다. 그녀는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후드티? 오늘이 ERP 오픈일인데? 김 부장은 그의 낡은 넥타이가 묘하게 민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세아는 이미 두 대의 모니터 앞에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긴 생머리는 밤샘 작업의 피로로 약간 헝클어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새벽의 LED 조명처럼 날카롭고 빛났다.

“응, 이 PM. 뭐 이상 있는 건 없나? 밤새 FI 모듈 쪽은 다 확인했어?”

김 부장이 습관적으로 물었다. 그의 주특기는 재무/관리회계 모듈, 즉 **FI(Financial Accounting)**와 **CO(Controlling)**였다. 이세아는 모니터를 힐끗 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 어젯밤 Universal Allocation(통합 배부) 로직 최종 검증까지 완료했어요. 로그는 깨끗하고요. 지금은 COPA(수익성 분석) 리포트 몇 개 돌려보고 있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부장님.”

걱정하지 말라고? 말은 쉽게 한다. 그의 속은 지금 **'Universal Allocation'**이 아니라 'Universal Anxiety(범우주적 불안감)' 상태였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젊음이 가끔은 부러우면서도 얄미웠다. 저 친구에게는 이 프로젝트가 몇 년 간의 커리어 중 하나겠지만, 김 부장에게는... 남은 은퇴까지의 잔여 수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리로 가서 낡은 노트북을 열었다. 굳이 열 필요는 없었지만, 이 공간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얇은 보고서 한 장을 펼쳤다. ‘광동제약 ERP 고도화 프로젝트 최종 점검 보고서’. 표지는 깨끗했지만, 안쪽의 글자들은 그의 눈에는 마치 흐릿한 주마등처럼 보였다.

지난 7개월.

보고서 100여 개, 회의 시간 500시간, 그리고 집에서 들은 아내와 딸의 잔소리 50,000마디. 그는 그 모든 것이 이 종이 한 장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그 과정은 시스템처럼 논리적이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꼰대와 요즘 애들 사이에서, 고객과 회사의 이익 사이에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그는 수도 없이 줄타기를 했다.

김 부장은 고개를 들었다. 프로젝트 룸 창밖으로 과천의 새벽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와 낮은 산봉우리들 위로 옅은 주황색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곧 수많은 직장인들이 이 지정타로 몰려들어, 마치 이 ERP 시스템처럼 돌아갈 것이다.

이세아 PM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그 소리는 긴장된 공간 속에서 일종의 백색 소음처럼 울렸다.

“이 PM. 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들어와.”

김 부장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세아는 대답 대신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인사했다. 그는 복도 끝의 비상구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 아래쪽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이 '칙' 소리를 내며 불꽃을 일으켰다.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퍼지자, 7개월간 굳어있던 어깨의 근육이 미세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후―.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그는 생각했다. 나는 결국 무엇을 해낸 걸까. 이 복잡한 회계 시스템을 구축한 건 기술적 승리일까, 아니면 그냥 50대 가장의 고단한 일상이었을까. 담배를 든 손을 내려다보니, 그의 낡은 넥타이가 새벽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곧 시작이다.”

그는 담배꽁초를 비상구 벽에 설치된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다시, 차가운 유리 냉장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덟 시 정각, 시스템이 열린다.

 


1장. 김 부장, 광동제약을 만나다

오래된 넥타이의 역사

김현수 부장은 컨설턴트 생활 20년 만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ERP(전사적 자원 관리)**라는 것은 결국 인생과 같다는 것. 시작은 거창하지만 과정은 복잡하고, 끝은 늘 희미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고서와 회의라는 지옥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가 '김 부장'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이었다. 이름은 김현수. 전문 분야는 SAP의 재무회계와 관리회계, 통칭 FI/CO 모듈. 90년대 말, 한국에 SAP R/3 열풍이 불기 시작할 때 이 바닥에 뛰어들었으니, 그는 거의 살아있는 SAP 역사책이었다. 그의 젊음은 온통 ‘더블 클릭’과 ‘엔터’ 키를 누르는 데 바쳐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좀 재미있었지. 진짜 기술자가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는 출근길 지하철 4호선 안에서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선 20대 청년은 이어폰을 꽂은 채 액정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김 부장의 중얼거림은 그저 혼잣말이었다. 20년 전, 그는 고객사 임원 앞에서 'R/3'의 혁신성을 설명할 때마다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건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일종의 정신 개조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가 속한 중소 컨설팅 회사는 대기업 프로젝트는커녕, 겨우 중견기업의 S/4HANA 컨버전스고도화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나이는 50대 중반. 그의 경력은 후배들에게는 'Old School'의 상징이 되었고, 고객사 담당자들에게는 '믿음직한 꼰대'로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그가 매일 아침 매는 낡은 체크무늬 넥타이는 바로 그의 'Old School' 명찰이었다. 아내는 진작에 그 넥타이를 버리라고 했지만, 김 부장은 굳이 고집을 부렸다. 이 넥타이에는 그의 젊음과 치열했던 밤샘 작업의 땀, 그리고 수많은 Go-Live의 전율이 새겨져 있었다. 일종의 **마음속 Legacy System 같은 것. 새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싶지 않은, 소중한 과거의 기록물이었다.

“휴. 광동제약이라… 박카스 만드는 회사지.”

김 부장은 오늘부터 출근할 과천지식정보타운을 떠올렸다. 낯선 이름만큼이나 낯선 환경이었다. 지정타에 들어선 신사옥들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차가웠다. 마치 그의 낡은 넥타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첫 회의실: 낡음과 새로움의 충돌

광동제약 프로젝트 룸은 신사옥답게 넓고 깨끗했다. 하얀 벽과 회색 바닥, 그리고 회의실 중앙을 차지한 거대한 빔 프로젝터까지. 모든 것이 반짝였지만, 그 반짝이는 공간 안에는 20년 경력의 베테랑과 10년 차도 되지 않은 젊은 피들이 함께 숨 쉬어야 하는 불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 첫날. 김 부장은 컨설팅 팀의 가장 연장자이자, FI/CO 모듈의 총괄 책임자로 소개되었다.

“네, 김현수 부장님은 이 바닥에서는 거의 전설이시죠. 초기 R/3 도입부터 수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셨습니다. 특히 원가 관리(Controlling) 쪽은 국내 최고 전문가십니다.”

우리 회사 대표가 그를 치켜세웠다. 김 부장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전설'이라는 단어가 왠지 '화석'과 동의어처럼 들려 씁쓸했다.

고객사 측에서는 최동진 차장이 메인 담당자로 나왔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이미 피곤에 절어 있었다. 수십 년간 써온 구닥다리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일을 맡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광동제약 재무팀의 최동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김 부장과 악수하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는 **‘빨리 해주고 가세요, 제발’**이라는 간절함이 역력했다. 김 부장은 그 눈빛을 읽었다. 20년 동안 수없이 봐온, 시스템 개편을 반기지 않는 현업 담당자의 전형적인 표정이었다. 시스템 개편은 곧 일의 증가와 책임의 전가를 의미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낯선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번 프로젝트의 PM(프로젝트 매니저)은 이세아 매니저가 맡게 되었습니다. 효율적인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애자일(Agile) 방식스크럼을 도입할 예정입니다.”

이세아 매니저. 프롤로그에서 만났던 그 후드티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은 그대로였다. 20대 후반. 김 부장의 딸과 비슷한 나이였다.

“안녕하세요, 이세아입니다. 저희는 매일 짧은 데일리 스크럼 미팅으로 이슈를 빠르게 파악하고, 불필요한 보고서 작성을 최소화할 계획입니다. **'Business Blueprint(업무 설계서)'**는 핵심만 빠르게 정리하고, 개발 단계에서 피드백 루프를 자주 돌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은 빨랐고, 쓰는 용어는 김 부장에게는 다소 생소했다. '스크럼', '애자일', '피드백 루프'. 김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20년 동안 그는 두꺼운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보고서와 완벽한 **WBS(Work Breakdown Structure)**에 익숙했다. 완벽하게 계획하고, 완벽하게 문서를 만든 후, 완벽하게 실행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세아의 방식은 달랐다.

김 부장은 조용히 메모를 했다. ‘스크럼: 뭐 하는 회의인가?’, ‘애자일: 뭐랄까, 대충 하는 건가?’

TO-BE 모델, 상상 속의 미래

다음 순서는 현업의 업무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앞으로 구축할 시스템의 이상적인 모습, 즉 TO-BE(투 비) 모델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최동진 차장이 기존 시스템의 문제점, 이른바 AS-IS(애즈 이즈) 모델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희 재무팀은 월말 결산 때마다 죽을 맛입니다. 특히 계정 배부(Allocation) 로직이 너무 복잡해서요. 각 사업부별 손익을 분석하려면 데이터를 수동으로 엑셀에 옮겨서 다시 가공해야 합니다. 이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그리고 오류도 잦고요.”

최 차장의 설명은 솔직하고 구체적이었다. 김 부장의 머릿속에서 그의 전문 영역인 FI/CO 모듈의 로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S/4HANA에서는 'Universal Allocation' 기능을 통해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최 차장님, 걱정 마십시오. S/4HANA의 핵심 기능 중 하나가 Universal Allocation입니다. 과거 복잡했던 코스트센터 배부나 수익성 분석 배부 로직을 하나로 통합하고, 실시간 분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기존처럼 월말에 엑셀 작업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실 겁니다.”

김 부장의 목소리는 명쾌했고, 20년 경력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최 차장의 얼굴에 비로소 희미한 희망의 빛이 돌았다.

그때, 이세아 PM이 끼어들었다.

“네, 좋은 포인트입니다, 부장님. 하지만 저희의 TO-BE 모델은 단순히 Universal Allocation의 적용에 그치지 않습니다. 저희는 SAP Analytics Cloud와의 연계를 통해... 미래 예측 기반의 경영 계획을 수립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녀는 프로젝터 화면에 새로운 슬라이드를 띄웠다. 'Future State: Predictive Accounting and AI-Driven Planning'.

김 부장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시스템의 **'핵심'**을 해결해 주는 것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세아는 이미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비전은 논리적으로 완벽했지만, 지금 당장 복잡한 AS-IS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현업 담당자들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음… 이 PM. 그건 맞는데, 일단 재무 보고서의 신뢰성 확보가 최우선 아닌가요? 예측은 그 다음 문제죠.”

“부장님, 지금 시대에는 보고서의 신뢰성 확보는 기본 전제입니다. 저희는 그 기본을 넘어, 기업의 의사 결정 속도를 가속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디지털 코어라는 게 그냥 있는 말이 아니잖아요.”

이세아의 반격은 단호했다. 김 부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디지털 코어'? 자신이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진정한 이유는 이세아의 '미래 지향적인' 비전을 기술적으로 구현해 줄 **'옛날 기술자'**이기 때문인가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회의실에는 미묘한 냉기가 흘렀다. 최동진 차장은 이 둘의 논쟁을 조용히 지켜보더니, 갑자기 기침을 하며 중재에 나섰다.

“두 분 말씀 모두 맞습니다. 일단 저희는 월말 결산을 편하게 해주는 것부터 좀… 부탁드립니다. 그게 안 되면, 미래 예측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하하.”

최 차장의 솔직한 '현실 직시' 발언에 회의실의 긴장은 조금 풀렸다. 김 부장은 최 차장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현업은 화려한 AI-Driven Planning보다, 오늘 저녁 야근을 줄여줄 현실적인 해답을 원한다.

지정타에서의 첫 점심: 낯선 풍경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맞이한 첫 점심시간. 김 부장은 이세아 PM을 비롯한 젊은 팀원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그들은 이미 지정타 맛집 리스트를 공유하며 오늘의 메뉴를 정해놓은 듯했다.

“부장님, 저희 오늘 디테크타워 지하에 있는 카페 일상사 가요. 파니니 맛있대요.” 이세아가 앞장서며 말했다.

‘카페 일상사’라. 김 부장은 밥 대신 파니니를 먹는다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의 시대에는 뜨끈한 국물이나 든든한 백반이 점심의 정석이었다. 그는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디테크타워 지하 1층에 위치한 카페 일상사는 통창으로 되어 있어 지하 같지 않았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김 부장에게는 낯설면서도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젊은 팀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코코넛라떼나 냉침밀크티를 주문했지만, 김 부장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부장님, 드셔보세요. 여기 파니니 정말 맛있어요. 사장님이 소스 직접 만드신대요."

이세아가 접시를 내밀었다. 김 부장은 파니니 조각을 받아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 괜찮았다. 그는 씁쓸한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파니니를 번갈아 먹으며 생각했다.

‘세상이 정말 바뀌고 있구나.’

점심 식사 방식부터, 일하는 방식, 그리고 사용하는 IT 용어까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시계의 낡은 부품처럼, 새로운 시스템에 억지로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김 부장님, 혹시 R/3 시절 프로젝트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어요? 그때는 정말 시스템이 잘 안 돌아가서… 텐트 치고 주무셨다면서요?”

옆자리에 앉은 젊은 컨설턴트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김 부장은 잠시 멈칫했다. R/3 시절 이야기는 이제는 그저 '옛날이야기' 취급이었다. 텐트 치고 밤샘 했던 그 고생스러운 기억이, 이들에게는 재미있는 **'전설'**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하… 뭐, 그랬지. 그때는 지금처럼 클라우드나 이런 것도 없었고. 서버 하나 잘못 만지면 회사 전체가 멈췄거든. 지금의 S/4HANA처럼 모든 게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었어.”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자부심과 함께, 그 시절의 치열함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상실감도 함께 배어 있었다.

퇴근길: 다음 출근을 기약하며

광동제약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프로젝트 룸을 나서는 김 부장의 어깨는 왠지 모르게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낡음'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서성였다.

낡은 넥타이를 맨 그는 S/4HANA라는 최신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20년 경력의 연장자인 그는 20대 후반의 PM의 지휘를 따라야 했다. 그는 뜨끈한 백반을 원했지만, 파니니를 먹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과천 지정타의 저녁 풍경은 조용했다. 첨단 건물들의 불빛이 일제히 켜지며, 마치 거대한 미래 도시의 모형처럼 느껴졌다. 김 부장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 부장: 아빠 오늘 첫 출근 잘했어. 저녁은 엄마랑 먹어.

딸(민지): 넹. 내일 야근하지 마세용.

딸의 짧은 대답은 언제나처럼 무심했지만, 그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7개월의 프로젝트는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의 기술자로서의 가치를, 그리고 50대 가장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증명할 기회.

그는 지하철을 탔다. 창밖으로 과천의 불빛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S/4HANA라… 새로운 세상이겠지. 그래, 내 낡은 넥타이도 저 신세계를 좀 구경시켜 줘야지.’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매만졌다. 비록 방식은 달라도, 이세아 PM이든, 최동진 차장이든, 결국 모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시스템의 성공적인 오픈. 그 목표를 위해, 그는 내일도 이 낡은 넥타이를 매고, 이 새로운 출근길을 걸어야 했다.

그의 컨설턴트 인생 20년의 모든 경험이, 바로 이 광동제약 고도화 프로젝트에 걸려 있었다.

 


2장. SAP S/4HANA와 중견기업 문화의 충돌

스크럼, 스크램블, 스크래치

프로젝트 착수 2주 차, 김 부장은 아침마다 새로운 용어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이세아 PM이 주도하는 ‘데일리 스크럼’ 미팅 때문이었다.

아침 9시 정각. 이세아는 프로젝트 팀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보통 15분. 이 짧은 회의에서 각 팀원은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 그리고 자신을 막고 있는 ‘Impediment(방해 요소)’ 세 가지를 빠르게 공유해야 했다. 김 부장은 그 방식이 왠지 모르게 초조했다.

“어제, FI 쪽 신용 관리 모듈 설정 검토 완료했습니다. 오늘은 **Controlling(관리 회계)**의 원가 요소(Cost Element) 마스터 데이터 정합성 검증 예정입니다. 방해 요소는… 없습니다.”

김 부장이 간결하게 보고를 마치자, 이세아는 노트에 뭔가 끄적였다. 이세아의 방식은 효율적이었다. 길고 지루한 회의는 없었다. 하지만 김 부장에게는 뭔가 찝찝했다. 마치 중요한 부분을 빠뜨린 채 급하게 만든 스크램블 에그 같았다.

“부장님, WBS(Work Breakdown Structure) 진척도를 업데이트해주셔야죠.” 이세아가 말했다.

“WBS? 아, 그 작업 분해 구조 말이지? 그건… 내가 퇴근 전에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줄게.”

이세아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부장님, 저희는 WBS를 JIRA(지라) 툴로 관리하고 있어요. 실시간 업데이트가 원칙입니다. 종이 문서나 이메일은 지양하고 있습니다.”

김 부장은 속으로 '아니, 뭐가 이렇게 복잡해?'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음… 알았어. 오늘부터 적응해 볼게."라며 낡은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그는 엑셀 파일로 WBS를 만들고, 그걸 프린트해서 형광펜으로 칠해가며 진척도를 확인하는 게 훨씬 익숙했다. 눈으로 봐야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이세아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비효율의 극치인 모양이었다.

김 부장에게 **‘JIRA’**는 그저 복잡한 웹사이트였고, **‘스크럼’**은 아침마다 자신을 심문하는 짧은 취조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20년 노하우가 이 젊은 PM 앞에서는 **‘방해 요소’**로 취급받을까 봐 내심 불안했다.

Simplification List: 변화를 거부하는 현업

진짜 충돌은 고객사 현업과의 회의에서 발생했다. 바로 S/4HANA 전환의 핵심적인 변화, 'Simplification List(단순화 목록)' 때문이었다. S/4HANA는 과거 R/3에서 사용되던 수많은 복잡한 기능들을 과감하게 없애고(Deprecation), 새로운 단일 테이블(Universal Journal) 중심으로 구조를 단순화했다.

김 부장은 최동진 차장을 비롯한 재무팀원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자, 이제 재무 보고서 쪽 **AS-IS(현행 업무)**를 **TO-BE(미래 업무)**로 어떻게 전환할지 논의하겠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에 쓰시던 Special Purpose Ledger 기능이 S/4HANA에서는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제 모든 데이터는 ACDOCA 테이블로 통합됩니다. 장부 구조가 훨씬 단순해지고, 실시간 분석이 가능해집니다.”

김 부장의 설명은 논리적이고 명쾌했다. 기술적으로 볼 때, 이는 광동제약의 비효율적인 월말 결산을 해결할 최고의 해법이었다.

하지만 최동진 차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부장님, 잠깐만요. Special Purpose Ledger가 없어진다고요? 저희가 이 기능을 **‘사장님 전용 보고서’**를 만들 때 10년 넘게 써왔는데요? 기존 재무제표와는 별도로, 사장님께서 보시는 특별한 관점의 재무 보고서요. 그걸 없애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최 차장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김 부장은 설명했다.

“차장님, 이제는 그런 별도의 복잡한 기능이 필요 없습니다. Extension Ledger라는 새로운 기능을 사용하시면, 기존 장부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사장님만의 특별한 관점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훨씬 유연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업 담당자들의 눈빛은 '유연성'이나 '단순화'가 아닌, **'귀찮음'**과 **'불안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10년간 익숙하게 써왔던 '우리 회사만의 방식'을, 그것도 사장님께 직접 보고하던 방식을 바꾸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존재의 이유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아니, 그래도요.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배우는 거지만, 기존에 익숙한 게 없어진다는 게… 불안해서요. 저희는 ‘그냥 쓰던 대로’ 쓰고 싶은데. 그게 안 되나요?”

최 차장은 솔직하게 말했다. 중견기업 문화 특유의 **'관행과 전통'**의 힘이었다. 시스템의 효율성보다,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익숙함'**이 훨씬 더 중요했다.

중견기업 보고서 지옥의 벽

회의는 난항을 겪었다. 기술적인 문제보다, 문화적인 저항이 더 컸다. 현업팀은 끊임없이 기존 방식의 유지를 요구했고, 이는 곧 **Scope Creep(범위 증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이세아 PM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더니,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프로젝트는 SAP S/4HANA의 표준 기능 구현을 원칙으로 합니다. 과거 R/3 버전의 비표준 기능을 재구현하는 것은 비용과 시간문제뿐만 아니라, 향후 업그레이드에도 치명적인 걸림돌이 됩니다. Simplification List는 SAP의 미래 방향성입니다. 광동제약이 미래로 가려면, 과거의 비효율적인 관행은 끊어내셔야 합니다.”

이세아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하지만 너무 차가웠다. 현업 담당자들은 이세아의 단호함에 오히려 더욱 마음의 문을 닫는 것 같았다.

최 차장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도 알죠. 미래로 가야 한다는 거. 근데… 저희는 사장님 지시 사항이 무서워서요. 사장님이 딱 정해놓으신 양식의 보고서가 있거든요. 그걸 시스템에서 뽑아내지 못하면, 저희가 다시 엑셀로 노가다를 해야 해요. 시스템이 바뀌어도 보고서 지옥은 안 끝나는 거죠."

김 부장은 최 차장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시스템의 기술적 완벽함과 별개로, 중견기업에는 사장님의 취향이 곧 시스템이었다. 재무회계 이론이나 Universal Journal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장님 전용 보고서'를 제때 뽑아내는 것이 그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김 부장이 중재에 나섰다.

“음… 이 PM 말이 맞습니다. 비효율적인 기능을 고수하는 건 미래에 독이 되죠. 하지만 최 차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자, 그럼 이렇게 하시죠. Special Purpose Ledger는 없애는 게 맞습니다. 대신, 보고서 문제는 제가 직접 최 차장님과 함께 고민하겠습니다. ABAP 개발자를 붙여서 기존 보고서 양식을 최대한 살리는 Customizing 작업을 진행하되, 데이터는 표준 ACDOCA에서 가져오도록 로직을 짜봅시다. 어때요?”

김 부장은 타협점을 제시했다. 표준 준수라는 대원칙은 지키되, 현업의 불안감을 해소해 줄 현실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세아는 김 부장을 잠시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Scope Creep이 발생하면 안 됩니다, 부장님. **KPI(핵심 성과 지표)**에 영향이 가요."

“알았어, 이 PM. 내가 책임질게. 일단 현업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게 급선무야.”

김 부장은 최 차장에게 "걱정 마세요, 보고서요? 제가 20년 동안 보고서 때문에 밤샌 게 몇 번인데. 사장님 입맛에 맞는 보고서, 제가 만들어드리죠."라며 윙크를 했다. 최 차장은 그제야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탕비실의 혼잣말과 출퇴근길의 사색

오후 늦게, 김 부장은 머리를 식힐 겸 탕비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젊은 팀원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아까 김 부장님 봤어? 옛날 시스템 얘기만 하시더라. 솔직히 요즘 세상에 Special Purpose Ledger 같은 거 누가 쓴다고 그걸 붙잡고 있냐?”

“맞아. 애자일로 빠르게 치고 나가야 하는데, 부장님은 늘 Waterfall(폭포수) 방식이 몸에 배신 것 같아. 하나하나 문서화해야 직성이 풀리시니….”

김 부장은 탕비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자신이 **‘옛날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음… 내가 너무 구식인가. 아니, 그래도 기술의 근본은 바뀌지 않잖아. FI/CO의 기본 원리는 R/3든 S/4HANA든 똑같아.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져도, 결국 현업이 쓰지 못하면 쓰레기지.’

그는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조용히 탕비실을 나섰다. 자신이 고수하는 방식이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통해 얻어낸 **'경험적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날 퇴근길. 김 부장은 과천 지정타의 신축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건물들은 모두 완벽하게 설계되었고, 논리적이며, 효율적이었다. 마치 SAP S/4HANA처럼.

하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달랐다. 최 차장처럼 '사장님 보고서'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세아처럼 '미래의 효율'을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시스템은 논리적이지만, 회사는 감정적이다.'

그는 다시 한번 이 명제를 되새겼다. 그는 기술자였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단순히 기술적인 해답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기술과 감정, 시스템과 문화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했다.

낡은 넥타이를 맨 그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걸어가는 기술자이자, 고단한 직장인의 삶을 이해하는 상사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일은 또 어떤 비효율적인 관행이, S/4HANA의 완벽한 논리에 도전장을 내밀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회의에서 쓸 중재안과 Customizing 로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음… 솔직히 말하면, 이 복잡함 속에서 그는 20년 전 R/3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묘한 도전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해낼 수 있을까? 그래, 해봐야지. 나는 기술자잖아.


3장. 과천 지식정보타운, 점심 식당의 생존 전략

런치타임, 지정타의 스크럼

광동제약 프로젝트 3주 차에 접어들었다. 프로젝트 팀원들은 매일 아침 '데일리 스크럼'이라는 짧고 고통스러운 회의를 견뎌내야 했지만, 진정한 **‘생존을 위한 스크럼’**은 정오, 딱 12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과천 지식정보타운(지정타)의 수많은 첨단 건물들에는 광동제약뿐만 아니라, IT, 바이오, 건설 등 수많은 기업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 모든 기업의 직장인들이 12시 땡 하자마자 일제히 뛰쳐나왔다. 이세아 PM이 아침마다 외치는 **‘효율성’**이나 ‘애자일’ 따위는 점심시간 앞에서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들에게는 **‘선착순’**이라는, 고대 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장 원시적인 방식만이 통했다.

“부장님, 오늘 점심 뭐 드실 거예요?”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은 TO-BE 모델을 설계하는 일만큼이나 복잡하고 중요했다. 김 부장은 아직 지정타 지리에 익숙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최동진 차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김 부장님, 이쪽 지정타는 새로 생긴 곳이라 맛집이 많지 않아요. 특히 12시 땡 하면 모든 식당이 대기열이 10명 이상이에요. 저희는 일종의 **Lunch Cut-over Plan(점심 이관 계획)**을 철저히 짜야합니다.”

최 차장의 비장한 표정에 김 부장은 피식 웃었다. Cut-over Plan이라니, 7개월짜리 ERP 프로젝트를 통째로 점심시간에 비유하고 있었다.

“음… 최 차장. 그럼 우리가 짠 **WBS(작업 분해 구조)**에 따르면,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게 가장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까?”

“어제 동향 파악을 했습니다. 닭한마리 칼국수집은 어제 대기 시간이 25분이었어요. 오늘은 아마도 A 타워 지하의 순두부찌개집이 가장 변수가 적을 겁니다. 거긴 회전율이 빠르거든요. 11시 50분에 출발해야 Go-Live 가능합니다.”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전율'**이라. ERP 시스템의 성능 지표인 **‘Response Time(응답 시간)’**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들렸다.

그들은 11시 50분, 마치 Go-Live D-Day를 맞은 것처럼 비장한 얼굴로 프로젝트 룸을 나섰다. 낡은 넥타이를 맨 김 부장과 피곤에 절은 최 차장의 발걸음이 빨랐다. 뒤에서 이세아 PM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점심으로 미리 포장해 온 샐러드를 사무실에서 먹을지, 아니면 팀원들과 함께 갈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최 차장과의 '엑셀 노가다' 공감대

결국 그들의 점심 Cut-over Plan은 성공적이었다. 12시 5분에 순두부찌개집에 도착했고, 대기 없이 바로 자리를 잡았다. 뜨끈한 순두부찌개가 끓는 소리는, 7개월간의 프로젝트 기간 동안 김 부장이 가장 듣고 싶었던 '힐링'의 사운드였다.

“크아… 이게 살맛이죠. 아무리 S/4HANA가 좋다고 해도, 이 뜨끈한 국물 한 숟가락이 주는 위로만큼은 구현 못 할 겁니다.”

김 부장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최 차장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부장님. 저희가 아무리 TO-BE 모델을 멋지게 설계해 봤자, 결국 이 삶의 **AS-IS(현행)**는 순두부찌개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프로젝트 회의실에서는 늘 팽팽한 긴장감 속에 SAP 용어를 주고받았지만, 이 순두부찌개 앞에서는 그저 고단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최 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장님, 지난번에 저희 사장님 보고서 때문에 말씀드린 거… Special Purpose Ledger 대신 Extension Ledger 쓰는 거, 현업에서 반발이 좀 심해요.”

“음… 그럴 줄 알았지.” 김 부장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장님 보고서는 곧 그 회사의 철학이니까. 그걸 바꾼다는 건, 광동제약의 역사를 뒤엎는 거랑 비슷하지.”

최 차장은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저희 팀원들은 S/4HANA 도입의 필요성은 알아요. 근데 그 과정의 고통이 너무 싫은 거죠.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할 생각에 다들 밤잠을 설쳐요. 결국 시스템은 컨설턴트분들이 만들지만, 그 데이터를 넣고 돌리는 건 저희 몫이니까요.”

그들의 대화는 이미 Scope Creep을 넘어, 중견기업의 조직 문화개인의 불안감이라는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 있었다. 김 부장은 이세아 PM이 들으면 당장 "부장님, 비업무적인 대화는 지양해 주세요!"라고 할 법한 이야기였다.

“내가 압니다, 최 차장. 엑셀 노가다로 밤새우는 거.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져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 걱정 마요. 보고서 부분은 내가 확실하게 Customizing 해서, 최 차장님이 다시 엑셀 만질 일 없도록 해줄게. 그게 내 20년 기술자의 양심이야.”

김 부장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최 차장은 고개를 들고 김 부장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회의실에서 보지 못했던 진솔한 감사함이 담겨 있었다.

“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저희 편을 들어주는 분은 부장님밖에 없어요. 이세아 PM은 너무 논리적이고 효율만 따져서… 저희 같은 현업의 **'감정적인 비효율'**은 이해 못 하는 것 같아요.”

김 부장은 픽 웃었다. "하하, 뭐. 나도 젊은 PM한테 맨날 꼰대 소리 듣는 처지라. 세대 차이, 문화 차이, 그거 다 시스템을 돌리는 변수지. 우리 기술자들은 그 변수까지 다 감안해서 설계를 해야 하는 거고."

순두부찌개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얼큰한 국물 덕분에 김 부장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몸은 고단했지만, 최 차장과의 인간적인 대화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래, 이 프로젝트는 최신 SAP 기술을 광동제약에 심는 일 이전에, 최 차장이라는 직장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오 사장과 카페 일상사의 '일상사'

식사를 마친 후, 김 부장은 젊은 팀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카페 일상사로 향했다. 김 부장은 코코넛라떼를 마시는 이세아 PM을 보며, 저 젊은 친구들에게는 **'단맛'**이 필요하고, 자신에게는 **'쌉싸름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아메리카노였다.

카페 일상사는 디테크타워 지하 1층에 있었지만, 통창 구조 덕분에 답답하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오히려 낭만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운터에는 오 사장이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오 사장은 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김 부장의 낡은 체크무늬 넥타이를 유심히 보더니, 가볍게 말을 걸었다.

“부장님. 오늘도 그 넥타이시네요. 뭔가 사연이 있는 넥타이 같아요.”

김 부장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 이거요. 20년 된 넥타이입니다. 버리질 못해서.”

오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게 참 멋있어요. 요즘은 다들 새것, 최신 것만 찾잖아요. 마치 우리 집 커피 머신처럼요. 다들 에스프레소 머신의 ‘새로운’ 추출 방식에만 관심을 두지, 결국 커피 한 잔이 주는 ‘일상적인’ 위로에는 관심을 덜 둬요.”

오 사장의 말은 단순한 카페 경영 철학을 넘어, 마치 김 부장에게 전하는 인생 컨설팅 같았다.

SAP S/4HANA가 아무리 최신 시스템이라도, 결국 그 안에 들어가는 데이터는 20년 전부터 쌓아온 광동제약의 ‘일상사(日常事)’ 아닙니까.”

김 부장은 오 사장의 깊은 통찰에 놀랐다. 오 사장은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맞습니다, 사장님. 저희는 지금 광동제약의 20년 **'일상'**을 새로운 시스템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근데 그 일상이 너무 복잡하고… 비효율적이어서요.”

오 사장은 빙긋 웃었다. “사람의 일상이 어디 논리적이고 효율적이겠어요. 부장님. 어떨 때는 문법도 안 맞고, 어떨 때는 갑자기 주제가 전환되기도 하죠. 근데 그게 다 쌓여서 오늘날의 부장님을 만든 거잖아요. 낡은 넥타이처럼.”

그는 커피 한 잔을 김 부장에게 건넸다. 김 부장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함 뒤에 오는 부드러움. 그의 복잡했던 머릿속이 왠지 모르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시스템은 논리적일 수 있지만, 인생은 늘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그 비효율이 바로 인간적인 거다.

이세아 PM이 옆 테이블에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부장님, 슬슬 프로젝트 룸으로 복귀하시죠. 오후 2시에 마스터 데이터 정합성 검토 회의 있습니다."

김 부장은 시계를 보았다. 1시 35분. 짧고 소중했던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오 사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카페 문을 나섰다.

오후를 위한 에너지 저장

다시 프로젝트 룸으로 돌아가는 길. 김 부장은 점심시간에 얻은 작은 위로와 통찰을 곱씹었다.

순두부찌개의 뜨거운 공감카페 일상사의 쌉싸름한 위로. 이 두 가지가 오후의 보고서 지옥을 견딜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오늘 오전에 이세아 PM과 현업이 충돌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이세아의 논리적이고 효율적인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김 부장의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중재가 없었다면, 현업은 마음의 문을 닫고 프로젝트는 더 큰 암초에 부딪혔을 것이다.

'나는 낡은 기술자이지만, 징검다리다.'

김 부장은 스스로에게 정의를 내렸다. 젊은 세대의 효율과 기성세대의 공감, 최신 시스템의 논리와 중견기업의 관행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프로젝트 룸에 들어서자, 이세아가 이미 회의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빠르고, 완벽했으며, 냉철했다. 하지만 김 부장은 더 이상 그녀에게 위축되지 않았다.

"이 PM. 잠깐. 내가 점심에 오곡 미숫가루를 마셔봤어야 하는데. 다음에 한번 마셔봐야겠어. 오 사장님이 그거 꼭 추천하시더라고."

김 부장이 농담처럼 말을 걸었다.

이세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딱딱한 얼굴에 인간적인 표정이 잠시 스치는 것을 김 부장은 놓치지 않았다.

"부장님, 오곡 미숫가루도 좋지만, 오후 회의 준비는 다 하셨죠? 마스터 데이터가 제대로 안 잡히면, 저희 FI/CO 모듈 전체에 치명적인 Impediment가 됩니다."

역시나 그녀는 곧바로 업무 모드로 돌아왔다. 김 부장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이 PM. 마스터 데이터? 그거 내가 20년 동안 다뤄왔어. 걱정 마. 우리 같은 기술자들이 마스터 데이터를 놓치면 쓰나.”

김 부장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노트북을 열었다. 낡은 넥타이가 묘하게 힘을 받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의 생존 전략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 생존 에너지는 이제 곧, 오후 2시부터 시작될 4장, 20대 PM과의 스크럼 회의라는 더 복잡하고 유쾌한 지옥을 견딜 힘이 될 터였다.

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다시 시작이다.


4장. 20대 PM과의 스크럼 회의 (세대 차이)

15분짜리 취조실, 스크럼

프로젝트가 중반을 향해 달려가면서, 김 부장은 이세아 PM이 주도하는 데일리 스크럼 회의에 대한 불만을 더 이상 숨기기 어려웠다.

아침 9시. 이세아는 벽에 붙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스톱워치가 들려 있었다.

“자, 시작합니다. 각자 3분 내로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 Impediment(방해 요소) 세 가지를 말씀해주세요. 시간 엄수입니다.”

김 부장은 속으로 **‘3분? 3분 안에 내가 20년 경력으로 쌓아 올린 지식을 어떻게 다 설명해!’**라고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늘 간결하게 정리된 문장만 내뱉어야 했다.

"어제는 CO 모듈원가 중심점(Cost Center)배부 로직을 재설계했습니다. 오늘은 제품 원가(Product Costing) 설정의 최종 밸리데이션(Validation)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Impediment는… 현업의 데이터 준비 지연 말고는 없습니다."

그의 차례가 끝나면, 이세아는 펜으로 화이트보드의 태스크 보드(Task Board)에 뭔가 '휙휙' 그렸다. 김 부장에게는 그 과정이 마치 자신의 노고를 디지털 툴 속에서 몇 개의 아이콘으로 축소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장님, Impediment는 현업의 지연이라고만 하지 마시고, 구체적인 원인과 함께 **Action Item(행동 항목)**을 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의 Sprint Goal(단기 목표) 달성에 영향이 가니까요.”

이세아는 늘 효율적인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단어들은 김 부장의 심장에 비효율적으로 박혔다. 김 부장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Sprint Goal? 이게 무슨 100미터 달리기냐?’ 그의 시대에는 WBS의 거대한 마일스톤(Milestone)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프로젝트 관리의 정석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세아가 쓰는 JIRAConfluence 같은 협업 툴이 뭔지 잘 몰랐다. 그는 중요한 내용은 반드시 프린트해서 밑줄을 긋고, 빨간 펜으로 메모를 해야 마음이 놓였다. 보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두툼한 종이 보고서를 고객사 임원에게 제출해야 비로소 '일했다'고 느꼈다.

“음… 이 PM. 보고서는 좀… 길게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나중에 감사경영진 보고 할 때, 핵심만 요약한 몇 페이지짜리 문서는 설득력이 약해.”

김 부장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부장님, 지금 시대의 경영진은 텍스트보다는 시각화된 데이터실시간 대시보드를 원합니다. 저희는 SAP Analytics Cloud와 연동해서 모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보여줄 계획입니다. 두꺼운 보고서는 오히려 의사 결정 속도를 늦추는 낭비입니다.”

낭비라니. 김 부장은 자신이 지난 20년간 밤샘하며 작성했던 수많은 Business BlueprintGap Analysis 보고서들이 일순간 **‘낭비’**로 치부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낭비의 시대를 살아왔지. 그리고 너희는 효율의 시대에 사는 거고.’

이세아는 김 부장의 낡은 넥타이처럼, 그의 방식 전체를 **'Legacy(구식)'**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논리적인 완벽함에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더욱 답답해졌다.

원가 회의: 경험 대 논리의 정면충돌

가장 큰 충돌은 김 부장의 전문 분야인 CO(관리 회계) 모듈, 특히 제품 원가 계산(Product Costing) 회의에서 터졌다. 광동제약은 다양한 음료와 의약품을 생산하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원가 계산은 시스템 고도화의 핵심 목표였다.

“자, 저희 광동제약은 생산 공정이 여러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각 단계별로 투입되는 인건비, 전력비, 소모품비 등의 **Activity Type(활동 유형)**을 정확히 반영해야 합니다.” 최동진 차장이 현업의 복잡성을 설명했다.

김 부장은 20년 경력의 노하우를 살려, 광동제약의 생산 구조에 가장 적합한 ABC(Activity-Based Costing, 활동 기준 원가 계산) 로직을 제시했다.

“저희는 생산 공정 특성상, ABC 방식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복잡한 로직이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정확한 의사 결정을 돕습니다. 과거 프로젝트 경험상….”

그가 **‘경험’**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이세아 PM이 끼어들었다.

“부장님, ABC는 R/3 시대의 복잡한 방법론입니다. S/4HANA는 **Material Ledger(재고 원장)**를 중심으로 모든 원가 흐름을 통합합니다. 저희는 표준 원가실제 원가를 실시간으로 비교하고 분석하는 Actual Costing(실제 원가 계산) 방식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세아의 주장은 최신 SAP 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완벽하게 맞았다. Material Ledger는 S/4HANA에서 원가 관리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김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 PM. 이론은 맞아. 하지만 광동제약처럼 다양한 제품을 소량 생산하는 구조에서는 Material Ledger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실제 원가 계산의 복잡성을 현업이 감당하지 못할 거야. 게다가 컨버전스(전환) 과정에서 과거 데이터의 정합성 문제가 터질 수 있어. ABC를 활용한 보조적인 로직이 반드시 필요해.”

김 부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갭(Gap)**을 지적했다.

“경험이요? 부장님, 저희가 S/4HANA를 도입하는 이유는, 과거의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경험을 버리고 글로벌 표준 프로세스를 따르기 위함입니다. 과거의 복잡한 로직을 재현하는 것은 곧 **기술 부채(Technical Debt)**를 쌓는 것과 같습니다. 저희는 단순함과 효율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세아의 목소리는 커졌고, 회의실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녀는 '기술 부채'라는 강력한 단어를 사용하며 김 부장의 '경험'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 부장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기술 부채? 내가 해왔던 모든 일이 부채였단 말인가?’

최 차장이 다시 중재에 나섰다. "어… 두 분 다 맞는 말씀인데. 저희는 그냥… 원가가 틀리지 않게만 나오면 됩니다. 사장님 보고서에 찍히는 원가 숫자가, 작년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야 저희가 안심을 하죠."

결국 회의는 이세아의 주류 논리를 따르되, 김 부장의 조언을 일부 반영하여 Material Ledger를 중심으로 하되, 특정 복잡한 공정에 한해서만 ABC 로직을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되었다. 김 부장은 승리했다고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경험적 통찰이 완전히 무시당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넥타이와 헤드폰: 집으로 돌아온 기술자

그날 밤, 김 부장은 늦게 퇴근했다. 밤 11시. 아내는 이미 잠들었고, 딸 민지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낡은 넥타이를 풀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이세아 PM의 **'효율'**과 **'논리'**에 시달린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잠시 후, 딸 민지가 방에서 나왔다. 귀에는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아빠, 안 잤어?”

“응. 이제 자려고.”

민지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그녀는 후줄근한 아빠의 모습과 대비되는, 힙합 스타일의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김 부장은 문득 낮에 이세아가 후드티를 입고 일했던 모습과 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빠, 그 넥타이 진짜 바꿔. 누가 요즘 그런 체크무늬 매냐.”

민지는 아빠의 넥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아빠의 아이덴티티야. 너희 세대가 이해 못 하는 가치가 있는 거라고.”

“에이, 됐어. 내 헤드폰이 아빠 넥타이보다 훨씬 더 내 아이덴티티거든. 이건 내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야.”

민지는 툭 던지듯 말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김 부장은 멍하니 넥타이를 바라봤다. 아이덴티티. 자신에게는 낡은 넥타이가 수많은 밤샘과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전통적 아이덴티티였다면, 딸에게는 헤드폰이 자신을 세상과 연결하고 단절시키는 디지털 아이덴티티인 모양이었다.

‘결국 세대 차이란,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덴티티의 매개체가 다른 것일 뿐이구나.’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세아가 주장하는 S/4HANA의 효율성과 딸이 매일 듣는 힙합 음악의 자유로움은 결국 같은 맥락이었다. 과거의 무거움을 벗어던지고, 지금의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식.

커피 한 잔과 어색한 공감대

다음 날 오후, 김 부장은 탕비실에서 커피를 뽑아 두 잔을 들고 프로젝트 룸으로 돌아왔다. 한 잔은 당연히 이세아 PM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PM. 아메리카노지? 잠깐 머리 식혀. 아까 회의 때, 너무 딱딱하게 군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해서 그래.”

김 부장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세아는 김 부장을 올려다보더니, 잠시 망설였다.

“괜찮습니다, 부장님. 하지만 회의는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니에요. 저희는 프로젝트의 목표기술적 논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김 부장은 그녀에게서 20년 전, 밤샘 작업에 지쳤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알아, 이 PM. 논리는 나도 알아. 근데, 말이야. 사람이 하는 일인데, 감정이 없을 수가 있나. 네가 말하는 그 기술 부채가, 사실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일 수도 있는 거야.”

김 부장은 중년의 직장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을 담아 말했다.

이세아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처음으로 업무와 무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부장님. 저희 아빠도… 부장님 나이쯤 되셨어요. 아빠는 아직도 낡은 윈도우 95 컴퓨터를 못 버리세요. 그게 당신의 역사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아빠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부장님을 보면서 조금은…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돼요.”

그녀의 말에 김 부장은 놀랐다. 그녀 역시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 속에서, 그 낡은 방식과 새로운 효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 그래. 낡은 컴퓨터든 낡은 넥타이든. 그 안에 들어있는 열정은 다 똑같지. 이 PM. 너도 대단해. 이 복잡한 프로젝트를 너처럼 젊은 친구가 이렇게 이끌어 가는 거 보면.”

“감사합니다, 부장님. 하지만 저는 부장님의 경험이 없으면,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요. S/4HANA는 새로운 시스템이지만, 결국 FI/CO 모듈의 핵심 로직은 부장님의 머릿속에 있거든요. 저희는 부장님의 경험을 빠르게 디지털화해서 쓰고 싶을 뿐입니다.”

이세아의 말은 솔직했고, 비로소 **'세대 차이'**라는 딱딱한 벽에 작은 틈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들의 갈등은 단순한 세대 싸움이 아니라, 경험의 지혜와 효율의 기술이 서로를 인정하고 융합해 가는 과정이었다.

김 부장은 남은 커피를 마셨다. 쓴맛 속에 왠지 모를 달콤함이 느껴졌다.

프로젝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보고서 지옥은 계속될 것이고, 스크럼 회의는 여전히 빡빡할 것이다. 하지만 김 부장은 이제 알았다. 이세아 PM은 자신을 꼰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라는 Legacy System을 어떻게든 S/4HANA로 컨버전(전환)시키려는 젊은 기술자라는 것을.

그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낡은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그래, 세대 차이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협업의 기회였다.

이제 그는 다음 단계, 보고서 지옥 속에서 가족 문제까지 겹치는 복잡한 일상으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그는 20대 PM과의 충돌 속에서 자신의 '기술자'로서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5장. '꼰대'와 '요즘 애들' 사이, 탕비실의 공감대

탕비실: 직장인의 은밀한 해방구

프로젝트는 지독한 '보고서 지옥' 단계에 들어섰다. AS-IS(현행 업무) 분석이 끝나고 TO-BE(미래 업무) 설계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광동제약 현업은 끝없이 새로운 요구사항을 냈고, 이세아 PM은 **Scope Creep(범위 증가)**을 막기 위해 으르렁거렸다. 김 부장은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느라 목이 쉬었다.

이럴 때, 직장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공간은 어디일까. 회의실도, 프로젝트 룸도 아니다. 바로 탕비실이다. 탕비실은 잠시나마 직급과 세대의 무게를 내려놓는 직장인의 은밀한 해방구였다.

프로젝트 룸 바로 옆 탕비실은 늘 은은한 커피 믹스 향과 함께 한숨 소리가 공존했다. 김 부장은 점심시간이 끝난 오후 3시,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믹스 커피 한 잔을 타러 들어섰다. 이미 그곳에는 20대 초반의 주니어 컨설턴트 두 명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 중이었다.

“아, Fixed Asset(고정자산) 모듈 진짜 미치겠어. 부장님이 자꾸 R/3 시절 얘기만 하시는데, S/4HANA에서 그 기능 다 사라졌잖아요. 너무 꼰대 같아, 솔직히.”

“맞아. 근데 어쩔 수 없지. 부장님은 그게 다 경험이잖아. 그리고… 솔직히 부장님 없으면 이 FI/CO 모듈 누가 잡냐. 이세아 PM도 애자일, 효율만 외치지, 실제 코딩 로직은 다 부장님한테 물어보잖아.”

김 부장은 믹스 커피를 타다가 잠시 멈췄다. '꼰대'라는 단어가 귓가에 꽂혔지만, 이어지는 말은 묘하게 따뜻했다. **‘부장님 없으면 누가 잡냐’**라니. 그들은 자신을 폄하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기술력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 부장은 일부러 기침을 하고 탕비실로 들어섰다. 젊은 팀원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음… 커피 한 잔씩들 해.” 김 부장은 믹스 커피 두 잔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아, 부장님…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괜찮아. 너희들 밤샘하고 힘들잖아. 야근 수당도 제대로 못 받는데, 커피라도 좋은 거 마셔야지.”

김 부장의 말에 젊은 팀원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야근 수당' 이야기는 그들의 아픈 곳이었다. 컨설팅 회사의 특성상, 야근 수당 대신 포괄 임금제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김 부장은 믹스 커피를 휘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꼰대라고 생각하는 거 알아. 나도 너희들이 이해 안 될 때가 많고. 근데, 하나만 알아둬. 내가 자꾸 R/3 시절 얘기를 꺼내는 건, 그게 너희들이 지금 구축하는 S/4HANA근본이니까 그래. 건물을 지을 때, 최첨단 외벽도 중요하지만, 기초 공사가 제일 중요하잖아. 나는 지금 그 기초 공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거야."

젊은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김 부장의 말 속에서 진정한 의도를 읽어냈다. 그가 단순히 **'옛날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지혜'**를 나누려는 기술자임을. 탕비실의 짧은 대화는 그들의 마음속 벽을 조금씩 허물어 놓았다.

흡연실: 중년의 솔직함

오후 늦게, 김 부장은 담배 한 모금의 절실함을 느끼며 옥상 흡연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광동제약 재무팀의 최동진 차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휴, 최 차장님. 오늘도 여기서 피신해 계시는군요.”

“김 부장님도요. 회의실에서 부장님 중재 아니었으면, 이세아 PM이랑 또 한 판 붙을 뻔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담배를 물었다. 쌉싸름한 연기가 과천의 차가운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솔직히 말하면요, 부장님. 저희 회사… 변화가 너무 싫어요. 시스템 고도화? 좋죠. 근데 저희 팀원들은 그 시스템이 들어와서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어질까 봐 걱정합니다. ERP가 똑똑해지면, 단순 반복 업무가 줄고, 결국 사람이 줄어들 거라 생각하는 거죠.”

최 차장의 고민은 깊었다.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ERP 컨설턴트로서 수많은 기업을 다녔지만, 결국 시스템 도입의 가장 큰 적은 **'사람들의 두려움'**이었다.

“나도 알아, 최 차장. 그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그림자지. 근데 말이야, ERP는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거야. 단순한 **Accounting(회계 처리)**이 아니라, **Strategic Finance(전략적 재무)**를 하라는 거지. 그게 살아남는 길이야.”

김 부장은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최 차장님, 나도요. 50대 중반에 이세아 PM 같은 젊은 친구들에게 효율성 지적받으면서 일하는 거 쉽지 않아요. 내가 20년 동안 쌓은 경험이 쓸모없어지는 건 아닌가, 매일 밤마다 걱정합니다. 근데 어떡하겠어요. 우리 같은 기술자들은 늘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는 숙명이 있는 걸. 그게 우리 생존 전략인 거죠.”

최 차장은 김 부장을 쳐다봤다. 컨설턴트와 고객사 담당자라는 직급을 넘어, **'고단한 50대 직장인'**으로서의 솔직한 공감이었다.

“부장님… 저만 힘든 게 아니었군요. 휴. 저희는 월말 재무 마감(Final Closing) 때마다 죽을 맛인데, 부장님은 시스템 마감 때까지 얼마나 신경 쓰시겠어요. 덕분에 힘이 납니다.”

두 사람은 짧은 담배 타임을 통해 끈끈한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시스템의 논리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적인 유대감이었다.

이세아의 눈물, 아버지의 위로

그날 밤, 프로젝트 룸은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김 부장은 가장 늦게까지 남아 고정자산(Fixed Asset) 마이그레이션 전략 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고정자산 데이터는 워낙 복잡하고 양이 많아, 여기서 오류가 나면 프로젝트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김 부장은 문득 이세아 PM의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키보드에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는 것을 김 부장은 발견했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김 부장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차가운 아메리카노 잔을 치우고, 탕비실에서 가져온 담요를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이 PM. 일어나. 여기서 자면 감기 걸려.”

이세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눈물을 닦았다.

“부장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괜찮아. 나도 너희 나이 때, 아니, 40대 때까지도 프로젝트 룸에서 울어본 적 많아.”

김 부장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논리도, 효율도, S/4HANA의 최신 기능도 아닌,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건넬 수 있는 위로였다.

“오늘… 본사 상무님한테 보고서 때문에 엄청 깨졌어요. 제가 준비한 실시간 대시보드보다, 부장님이 예전에 쓰셨던 표 형식의 월별 요약 보고서가 훨씬 직관적이라는 피드백을 들었어요. 제가 너무… 제 방식만 고집했나 봐요. 부장님이 옳았어요.”

이세아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효율'**과 **'논리'**가, 결국 광동제약의 **'관행'**이라는 벽에 부딪혀 무너진 것이다.

김 부장은 묵묵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넥타이를 맨 꼰대가, 후드티를 입은 요즘 애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이 PM. 너는 틀리지 않았어. 미래는 네 말이 맞아. 다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거야. 우리 같은 기술자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이관(마이그레이션)해야 하는 거야. 그게 진짜 어려운 일이지.”

김 부장의 말은 이세아에게 큰 위로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그치고, 다시 눈빛에 힘을 채웠다. 그녀는 김 부장의 낡은 넥타이가 아니라, 그 넥타이에 담긴 20년의 세월과 지혜를 본 것이다.

공감대: 프로젝트 성공의 열쇠

다음 날 아침, 데일리 스크럼 회의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세아 PM은 여전히 스톱워치를 들고 효율을 외쳤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김 부장의 **'경험'**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 있었다.

“어제, 고정자산 마이그레이션 전략을 김 부장님의 조언을 반영해서 수정했습니다. 부장님의 우려대로, 복잡한 감가상각 로직 때문에 표준 기능만으로는 현업의 요구를 충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프로젝트의 리스크를 줄이는 중요한 Action Item이 될 것입니다.”

이세아가 김 부장의 조언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젊은 팀원들은 놀랐지만, 곧 김 부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꼰대'**의 경험이 **'효율'**을 이긴 순간이었다.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세아 PM의 눈물과 최 차장의 한숨이, 그리고 탕비실의 믹스 커피가,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시스템은 논리적이지만,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이제 프로젝트 팀은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닌, 하나의 **전우(戰友)**가 되었다. 곧 다가올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라는 더 큰 위기 앞에서, 이 탕비실에서 형성된 공감대가 그들을 지탱해 줄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김 부장은 다음 주, 프로젝트 최대의 고비가 될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일정을 떠올리며, 낡은 넥타이를 꽉 고쳐 맸다.


6장.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 벼랑 끝의 컨설턴트

마이그레이션 D-Day: 숨 막히는 카운트다운

프로젝트 착수 4개월 차. 모두가 숨죽이는 날이 왔다. 바로 데이터 마이그레이션(Data Migration) D-Day였다. ERP 시스템 구축은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면, 데이터 마이그레이션은 그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지난 수십 년간 광동제약에 쌓여온 방대한 회계, 재고, 생산 데이터를 새로운 S/4HANA 시스템에 정확히 옮겨 넣어야 했다.

오후 8시. 광동제약 현업 담당자들이 모두 퇴근한 프로젝트 룸에는 컨설팅 팀원들만 남아 있었다.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이세아 PM은 평소보다 두 배는 날카로워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1미터 앞의 바늘 끝을 응시하는 것처럼 집중되어 있었다.

“**Cut-over Plan(시스템 이관 계획)**에 따라, 지금부터 마스터 데이터를 로딩합니다. LSMW를 이용한 FI/CO 데이터 로딩은 9시에 시작합니다. 김 부장님, G/L 잔액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세아는 빠르게 지시했고,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특기인 FI/CO 데이터, 즉 회사의 돈줄과 관련된 데이터를 옮기는 작업은 그의 책임이었다. 20년 경력의 기술자로서, 그는 이 작업이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데이터는 늘 배신했다.

밤 9시. 주니어 컨설턴트가 엔터 키를 눌렀다. 화면에 뜬 작은 메시지 박스가 **'Data Loading Start'**를 알렸다. 수십만 건의 G/L(총계정원장) 잔액 데이터가 구 시스템에서 신 시스템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로딩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다. 이세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까지 Success Rate 98%. 좋습니다. 김 부장님, 11시까지 최종 데이터 검증을 끝내고 미결 항목(Open Item) 정합성 확인 들어갑니다.”

김 부장은 커피를 마시며 묵묵히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는 컴퓨터의 숫자를 믿지 않았다. 그의 방식대로, 주요 계정 몇 개를 수동으로 뽑아내어 구 시스템의 **잔액(Balance)**과 신 시스템의 잔액이 일치하는지 비교하고 있었다. 20년 동안 그를 구해준 것은 결국 **‘수동 검증’**이라는 낡은 방식이었다.

배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밤 11시. 모든 FI/CO 데이터 로딩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프로젝트 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입니다, PM님!” 주니어 컨설턴트가 외쳤다.

이세아는 미소를 짓는 대신, 김 부장을 쳐다봤다. “김 부장님, 최종 검증 결과는요?”

김 부장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두 시간 동안 수동으로 검증한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음… 이 PM.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프로젝트 룸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G/L 잔액이 맞지 않아. 특히 매출 채권매입 채무 쪽 **Open Item(미결 항목)**이 구 시스템과 신 시스템에서 100% 일치하지 않아. 금액은 작은데, 건수가 상당하다.”

이세아의 얼굴에서 모든 핏기가 사라졌다. 금액이 작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잔액이라도 불일치하면, 새로운 ERP 시스템은 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회계 시스템의 잔액은 곧 회사의 신뢰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요! 저희가 Migration Cockpit에서 설정한 로딩 프로그램은 완벽했습니다! ABAP 개발자가 밤새도록 검증했어요!” 이세아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김 부장은 차분하게 말했다. “프로그램 문제는 아닐 수도 있어. 문제는 데이터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아. 구 시스템에서 넘어온 마스터 데이터정합성이 이미 훼손되어 있었을 수도 있지.”

책임 공방이 시작되었다.

이세아는 컨설팅 팀의 입장을 대변하며, 고객사(광동제약)가 제공한 데이터의 Cleanliness(청결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건 저희가 사전에 수없이 경고했던 부분이에요! 고객사 데이터가 이미 훼손된 상태에서 로딩되면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다음 날 아침, 사태를 파악한 최동진 차장이 프로젝트 룸으로 뛰어왔다. 그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데이터 정합성 문제라고요? 저희가 몇 주 동안 밤새서 검증한 데이터입니다! 오류가 있다면 컨설팅 팀의 **로딩 프로그램(LSMW 스크립트)**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저희는 S/4HANA에 익숙하지 않아요. 로직 오류 때문에 저희 데이터가 망가진 거라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최 차장의 목소리에는 절박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5장에서 형성되었던 공감대는 단숨에 무너졌다. 이들은 이제 함께 시스템을 만드는 동지가 아니라,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는 이해관계자가 되어버렸다.

벼랑 끝: 20년 경력의 무게

모든 시선은 FI/CO 모듈의 책임자인 김 부장에게 쏠렸다. 그는 이세아 PM의 논리적인 항변과 최 차장의 감정적인 공격 사이에서, 벼랑 끝에 선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자, 잠깐. 모두 진정하고.”

김 부장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책임 공방은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문제 해결이 우선이야. 최 차장님, 저희가 의도적으로 데이터를 망가뜨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 PM 말대로, 원론적으로는 데이터 정합성 문제가 맞아요. 하지만 우리 컨설팅 팀에도 책임이 있어. 사전에 이 정도로 취약한 데이터를 걸러내지 못했으니까.”

그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낡은 넥타이는 20년 경력의 '기술자'의 책임감을 상징하는 듯했다.

“이 PM. Migration Cockpit 로그를 다시 분석해 봐. 그리고 ABAP 개발자에게 부탁해서 미결 항목 중 정확히 어떤 계정에서, 어떤 종류의 트랜잭션(거래)에서 오류가 났는지 상세 보고서를 뽑아 달라고 해. 최 차장님, 현업 팀에게 부탁해서 구 시스템의 마스터 데이터 생성 시점트랜잭션 입력 기록을 전부 뽑아주십시오. 이건 데이터 배후를 쫓는 일이 될 겁니다.”

김 부장은 마치 베테랑 형사처럼 지시했다. 논리가 막힐 때, 그는 자신의 경험적 노하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G/L 잔액이 틀린다는 것은, 곧 그 잔액을 만들어낸 수많은 전표 중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밤샘 작업이 시작되었다. 프로젝트 룸의 불은 다시 꺼지지 않았다. 김 부장은 탕비실에서 연달아 믹스 커피를 마시며, 수천 줄의 G/L 잔액을 비교하는 엑셀 파일을 들여다봤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20년 전, R/3 프로젝트 초기에 겪었던 수많은 데이터 오류의 패턴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출 채권 미결 항목이 틀린다… 이건 분명, 이월 전표 처리 과정에서 구 시스템의 커스터마이징 로직이 S/4HANA 로직과 충돌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

그는 젊은 팀원들이 쓰는 최신 Migration Cockpit 대신, R/3 시절부터 써오던 낡은 수동 검증 툴을 사용하여 특정 계정의 전표 흐름을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낡은 넥타이의 빛: 해결의 실마리

새벽 5시. 김 부장의 낡은 노트북에서 해답이 나왔다.

“이 PM. 찾았다.”

이세아는 김 부장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밤샘 작업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했다.

“구 시스템에서 과거 선급금(Prepayment) 처리 시 사용했던 특별 계정 로직이 있었습니다. 현업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던 로직인데, 이게 S/4HANA의 **통합 저널(Universal Journal)**로 넘어오면서 데이터 형태가 바뀌었고, 그 결과 미결 항목이 자동으로 마감(Clear) 처리되지 않고 남아버린 겁니다. 이게 잔액 불일치의 원인입니다.”

이세아는 김 부장의 설명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말도 안 돼요… 저희가 사전 인터뷰 때 그런 로직은 없다고 들었는데.”

“없다고 했겠지. 현업에서는 그걸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 회사만의 엑셀 노가다 관행’**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보고를 안 했을 거고.” 김 부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야. 시스템이 아니라.”

이세아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그토록 외치던 **'논리와 효율'**이, 결국 현업의 **'비논리적인 관행'**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장님. 다시 로딩해야 하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적이었다.

“다시 로딩하면 시간이 이틀 이상 지연돼. 프로젝트 일정 전체가 망가져. 일단 임시방편을 써야지.”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다시 한번 고쳐 맸다. 그의 눈빛은 20년 전, R/3 시스템의 치명적인 오류를 해결하던 그 시절의 기술자로 돌아가 있었다.

“**임시 전표(Temporary Journal)**를 만듭시다. 오류가 난 계정의 잔액을 신 시스템에서 임시로 조정하는 전표를 치는 거야. 그리고 오픈 후에 Reverse(취소) 전표를 치는 거지. 그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최 차장님에게 부탁해서 구 시스템의 마스터 데이터를 우리가 발견한 로직에 맞춰 **수동으로 클렌징(정제)**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해.”

이세아는 김 부장의 제안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논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임시적인 해결책이었다.

“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부장님 아니었으면… 저희 진짜 망했을 겁니다.”

“괜찮아. 나도 이런 일 한두 번 겪은 거 아니야. 기술자라는 건, 완벽한 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터졌을 때 수습하는 사람이거든.”

벼랑 끝에서의 새벽

과천 지정타의 새벽은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김 부장은 텅 빈 탕비실에서 마지막 믹스 커피를 마셨다. 몸은 한계에 달했지만,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하고 임시방편이라도 찾아냈다는 사실에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라는 큰 산을 넘었지만, 이 실패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프로젝트 일정은 압박받을 것이고, 이세아 PM과의 관계, 그리고 최 차장과의 공감대 모두 다시 위태로워졌다. 게다가, 집에서는 늦어지는 귀가에 아내와 딸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터였다.

그는 낡은 넥타이 위에 손을 얹었다. 벼랑 끝의 기술자. 그는 시스템을 구해냈지만, 자신의 삶은 과연 누가 구해줄 것인가.

해가 뜨는 과천의 차가운 빌딩 숲을 보며, 김 부장은 자신의 일과 삶의 밸런스 버튼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프로젝트의 성공보다, 이 고단한 일상 속에서 인생의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새로운 결심을 안고 있었다. 이제는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도 고도화할 차례였다.


7장. 일과 삶, 밸런스 버튼을 찾아서

깨진 밸런스 시트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 후, 프로젝트는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김 부장은 G/L 잔액 불일치를 수동으로 조정하고, **미결 항목(Open Item)**의 배후에 있는 복잡한 전표 로직을 분석하느라 며칠 밤을 프로젝트 룸에서 보냈다. 그의 낡은 넥타이는 이제 만성적인 피로와 섞여 축 처져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재무회계(FI) 데이터의 **밸런스 시트(Balance Sheet, 대차대조표)**로 가득 차 있었다. **차변(Debit)**과 **대변(Credit)**이 정확히 일치해야 하는 회계의 완벽한 논리. 그러나 정작 김 부장의 **'인생 밸런스 시트'**는 완전히 깨져 있었다.

밤늦게 귀가한 날, 거실에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저녁 식사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김 부장을 맞이했다.

“요즘 당신 집에는 왜 들어와요? 그냥 프로젝트 룸에 아예 침낭 갖다 놓고 자요.”

아내의 비난은 논리적이었다. 남편으로서의 **의무(Debit)**는 지켜지지 않는데, **권리(Credit)**만 누리려 한다는 비판.

“미안해, 여보. 지금 프로젝트가 가장 중요한 고비라 그래. 데이터 마이그레이션이 꼬여서….”

“데이터가 꼬인 거랑 우리 가족이 꼬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당신 딸은 아빠 얼굴 본 지가 며칠째인지 알아요? 당신은 온종일 회사 일만 생각하고, 정작 집안일은 Impediment(방해 요소) 취급하잖아.”

아내의 분노는 타당했다. 김 부장은 S/4HANA 시스템의 **버그(Bug)**를 잡는 데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지만, 정작 자신의 결혼 생활의 버그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프로젝트 룸에서는 기술자였지만, 집에서는 고장 난 가장이었다.

딸 민지와의 관계는 더 심각했다. 민지는 아빠에게 대놓고 말했다. “아빠는 나한테 **Fixed Asset(고정자산)**이야? 아무리 오래돼도 **감가상각(Depreciation)**도 안 시키고 그냥 묵혀만 둘 거야?”

김 부장은 딸의 날카로운 비유에 충격을 받았다. 고정자산처럼 오래도록 곁에 있지만, 정작 그 **가치(Value)**를 갱신하지 못하고 방치해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 부장의 ‘가족 ERP’ 설계 시도

김 부장은 컨설턴트답게 이 위기를 **'시스템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노트북을 켜고, 엑셀 파일에 **'가족 관계 고도화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였다.

AS-IS (현행 가족 업무): 소통 부재, 잔소리 증가, 야근 지속.

TO-BE (미래 가족 관계): 주말 가족 캠핑, 평일 저녁 7시 정시 퇴근, 매일 밤 30분 대화.

그는 심지어 **WBS(작업 분해 구조)**까지 그렸다. '딸과의 대화' 태스크, '아내의 잔소리 경청' 태스크, '주말 외식' 태스크.

“음… ‘주말 외식’은 **Activity Type(활동 유형)**을 ‘고급 레스토랑 방문’으로 할당하고, **원가 중심점(Cost Center)**은 ‘아빠 지갑’으로 해야겠군.”

그가 프로젝트 관리 용어를 가족 관계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모습은, 코미디이면서도 슬펐다. 그는 모든 문제를 논리와 효율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가족이라는 시스템은 감정과 비논리로 돌아가는 가장 복잡한 시스템이었다.

그는 이세아 PM과의 회의에서 배웠던 Universal Allocation(통합 배부) 로직을 떠올렸다.

‘맞아. 내 모든 에너지(Cost)를 회사에만 몰아주지 말고, 가족에게도 공평하게 배부(Allocation)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내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시스템 설계는 완벽했지만, **리소스(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했다.

오 사장: 인생의 비효율 컨설턴트

결국, 김 부장은 다시 **'인생의 비효율 컨설턴트'**인 카페 일상사의 오 사장을 찾아갔다. 오후 2시. 프로젝트 룸에서 잠시 탈출하여 오 사장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부탁했다.

“사장님. 제가 말이죠. 프로젝트에서는 밸런스 시트를 기가 막히게 맞추는 기술자입니다. 근데 제 인생의 밸런스는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지 모르겠어요. 차변과 대변이 전혀 맞지 않아요.”

김 부장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오 사장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장님. 그거 아세요? 회계의 밸런스 시트가 딱 맞는 순간은 **결산(Closing)**이 끝난 순간뿐이에요. 그리고 그 결산은 단지 과거의 기록일 뿐이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인생은 결산이 없어요, 부장님. 매일매일이 **실시간 트랜잭션(Real-Time Transaction)**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어요. 완벽한 균형? 그건 죽은 시스템에서만 가능합니다. 살아있는 시스템은 늘 조금씩 **오류(Error)**가 나고, 끊임없이 **조정(Adjustment)**이 필요하죠.”

오 사장의 말은 충격이었다. 김 부장은 **완벽한 균형(Perfect Balance)**을 추구했기에, 그 불완전함에 좌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장님.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의 **시간(Debit)**을 회사에 몰아줬다면, 주말에는 **관심(Credit)**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균형을 맞춰(Adjust) 줘야죠. 그게 Universal Allocation 아닙니까. 돈뿐만 아니라, 마음과 시간까지 배부하는 거죠.”

“아… 마음과 시간의 배부….”

“그리고 비효율적인 것을 사랑하세요. 우리 카페의 인기 메뉴인 코코넛 라떼 보세요. 커피에 코코넛을 섞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이에요. 하지만 그 비효율이 주는 달콤함과 위로가 있잖아요. 부장님의 낡은 넥타이처럼요. 당신의 비효율적인 주말이 가족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자산(Valuable Asset)**일 겁니다.”

김 부장은 쌉싸름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오 사장의 **'인생 컨설팅'**은 그 어떤 SAP 교육보다도 강력하고 명료했다.

20대 PM의 뜻밖의 조언

프로젝트 룸으로 돌아온 김 부장은 우연히 이세아 PM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이세아는 노트북으로 FI/CO 모듈의 다음 단계인 **테스트 계획(Test Plan)**을 설계하고 있었다.

김 부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PM은 Work-Life Balance를 어떻게 맞춰?”

이세아는 키보드를 치다 멈추고 김 부장을 쳐다봤다.

“밸런스요? 부장님, 저에게는 밸런스가 없어요. 저는 제 일에서 가치를 찾아요. 밤샘하고 힘들지만, 이 S/4HANA 시스템이 돌아가는 걸 보면 희열을 느껴요. 부장님도 아마 그러셨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솔직했고, 김 부장도 그 희열을 알았다.

“하지만 저도 쉴 때는 쉬어요. 저는 **'완벽한 균형'**을 목표로 하지 않아요. 주중에 100% 일에 몰입했다면, 주말에는 100% 쉬어요. 중간은 없어요. 애매한 상태로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짜증내는 것보다, 차라리 일찍 출근해서 일을 끝내고, 가족들에게 웃는 얼굴 보여주는 게 훨씬 효율적이니까요.”

이세아의 **'효율'**은 단순히 업무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음… 100% 일, 100% 휴식이라. 그게 너희 세대의 애자일(Agile) 방식인가.”

“네. 중간이 없는 게 요즘 방식이죠. 부장님은 50대시니까 주요 고정자산이시잖아요.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합니다. 감가상각(Depreciation) 시키지 마시고, 재평가(Revaluation) 하세요. 가족과의 시간을 낭비로 보지 마시고, 다음 주 업무를 위한 에너지 충전으로 보세요. 그것도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김 부장은 놀랐다. 그의 **'꼰대'**적인 시각이, 이세아의 **'요즘 애들'**적인 시각에 의해 완전히 재해석되었다.

넥타이, 가족, 그리고 조화

김 부장은 그날, 완벽한 균형이라는 환상을 버렸다. 그의 인생 밸런스 시트는 영원히 차변과 대변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실시간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는 퇴근 후, 딸 민지의 방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민지는 여전히 헤드폰을 끼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김 부장은 딸의 방 문고리를 잡고, 잠시 망설이더니 문을 열었다.

“민지야. 아빠가 네 Fixed Asset이 아니라, 너를 위한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고 싶어서 말이야. 아빠의 감가상각 속도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아. 내일 아침, 아빠랑 같이 카페 일상사에 가서 코코넛 라떼 한 잔 마시러 갈까?”

딸 민지는 헤드폰을 벗고 아빠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코코넛 라떼요? 아빠가? 믹스 커피 말고?”

“응. 아빠도 이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아야지. 그리고 아빠가 너한테 **Allocation(배부)**할 시간을 따로 만들게. 아빠는 시스템을 만드는 기술자인데, 내 딸과의 관계 시스템 하나 제대로 못 만든다는 게 말이 되니?”

민지는 피식 웃었다. 아빠의 서툰 ERP 용어 사용이 오히려 진심으로 느껴졌다.

“좋아요, 아빠. 근데 아빠. 밸런스는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래요. 내일 아침, 제가 아빠의 밸런스 로직을 좀 짜 줄게요.”

김 부장은 딸의 말에 감동했다. 그는 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왔다. 밸런스는 만드는 것. 완벽한 균형 대신, 삶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에게 **조화(Harmony)**를 이루며 영향을 주는 것.

그는 다음 날 아침, 낡은 넥타이를 매는 대신, 좀 더 캐주얼한 스웨터를 입었다. 그리고 딸과 함께 과천 지식정보타운으로 향했다.

7개월간의 프로젝트는 이제 최종 오픈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라는 위기를 겪었지만, 김 부장은 자신의 인생 밸런스 버튼을 찾았다. 그는 이제 시스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 고도화하여 최종 오픈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8장. 최종 오픈 D-7, 예산과 시간의 압박

D-7: 벼랑 끝의 카운트다운

프로젝트 룸의 벽에 붙은 화이트보드에는 붉은색 매직으로 **'GO-LIVE D-7'**이라는 섬뜩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최종 오픈을 일주일 앞둔 과천 지식정보타운 오피스는 전쟁터 그 자체였다.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는 겨우 수습했지만, 그 여파로 예산과 시간이 모두 바닥났다.

아침 스크럼 회의 대신, 이세아 PM은 굳은 얼굴로 두툼한 보고서 한 권을 김 부장 앞에 내려놓았다. 예산 초과(Budget Overrun) 보고서였다.

“부장님. 최종 보고서입니다. 데이터 클렌징미결 항목 조정에 투입된 추가 인력 비용, 그리고 예상치 못한 ABAP 개발 요청으로 인해 프로젝트 예산이 15% 초과했습니다.”

15%. 중견기업의 기준으로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의 **Scope Creep(범위 증가)**과 6장의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가 결합된 최종 성적표였다.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매만졌다. S/4HANA 시스템이 아무리 효율을 외쳐도, 결국 시간이라는 현실적인 두 개의 G/L 계정은 완벽한 밸런스를 거부했다.

“광동제약 상무님께 보고해야지. 오늘 10시.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김 부장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 하지만 이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고객사가 제공한 데이터의 품질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이세아는 여전히 논리를 강조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이번 예산 초과는 큰 압박이었다.

중견기업 상무님의 ‘현실 회계’

10시, 광동제약 본사 회의실. 김 부장과 이세아 PM은 광동제약의 최 상무 앞에 앉아 있었다. 최 상무는 50대 후반으로, 보수적이지만 회사의 예산에는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훑어보더니, 안경 너머로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김 부장. 예산이 15%나 초과했어요. 게다가 최종 오픈(Go-Live) 일정을 단축시키지 못하고 겨우 맞춘 겁니까? 우리는 이 프로젝트로 효율화를 기대했는데, 지금 보니 비효율의 극치 아닙니까.”

최 상무의 공격은 정곡을 찔렀다. 김 부장은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예산 초과는 주로 데이터 정합성 문제 해결에 집중되었습니다. 기존 데이터의 복잡한 비표준 관행 때문에 클렌징에 예상보다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입되었습니다.”

이세아 PM이 논리적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S/4HANA 표준 프로세스에 맞춰 설계했지만, 고객사에서 10년 이상 사용해 온 특정 회계 로직을 재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ABAP 개발을 추가했습니다. 이는 향후 현업의 적응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투자입니다.”

최 상무는 코웃음 쳤다. “전략적 투자? 나는 그냥 컨설팅 비용 폭탄으로 보입니다. 컨설턴트들은 늘 비싼 용어를 써서 돈을 더 받아가려고 하더군. 비표준 관행? 우리 회사에서 10년 동안 잘 썼던 방식이 왜 갑자기 비표준이 됩니까? 결국 당신들이 우리 회사에 맞춰주지 못했다는 증거 아닙니까!”

김 부장은 상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기술적 논리는 맞지만, 고객의 감정적 논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중견기업에게 ERP는 시스템의 효율보다, CEO의 심기비용 절감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김 부장은 최 상무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무님. 최종적으로 발생한 예산 초과분에 대해서는… 저희 컨설팅 사에서 최대한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남은 일주일 동안, **UAT(인수 테스트)**를 완벽하게 끝내고 Go-Live에 차질이 없도록 모든 인력을 투입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최 상무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졌다. 김 부장은 기술자로서의 자존심을 잠시 접고, 프로젝트 관리자로서 신뢰를 회복하려는 길을 택한 것이다.

UAT: 시간과의 마지막 전쟁

예산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시간 부족이었다. 최종 오픈 일주일 전까지 **UAT(User Acceptance Test)**를 완료해야 했지만, 현업 담당자들의 참여도는 매우 낮았다.

프로젝트 룸에 모인 현업 팀은 피로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로 인해 추가 근무까지 한 최 차장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김 부장님, 저희도 사람입니다. 밤샘 작업으로 데이터 클렌징 겨우 마쳤는데, 이제 와서 UAT 테스트 케이스 300개를 또 돌리라고요? 저희 본업은 언제 합니까.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 너무 복잡해요. 저희는 기존 시스템이 더 편했어요.”

김 부장은 현업의 고통을 이해했다. 아무리 시스템이 좋아도, 익숙함을 이기기는 어렵다.

“최 차장님. 압니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 고비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완벽하게 시스템을 만들어도, 현업에서 테스트를 하지 않으면 오픈 후 장애는 피할 수 없습니다. 최종 재무 마감을 시스템으로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딱 일주일만 더 희생해 주십시오.”

김 부장은 최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희생을 제안했다.

“남은 일주일 동안, 저희 팀원들이 야근할 때 필요한 모든 식사비와 간식비는 제가 개인 돈으로 결제하겠습니다. 이건 회사 예산이 아니라, 제가 최 차장님께 드리는 기술자로서의 감사입니다. 부디 저희 시스템을 써 주십시오.”

최 차장과 현업 팀원들은 김 부장의 제안에 놀랐다. 예산 초과로 회사 간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상황에서, 김 부장의 개인적인 희생은 현업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냉정한 논리 대신, 따뜻한 인간미가 통했던 것이다.

탕비실 커피 믹스 봉지의 메모

밤 11시. 프로젝트 룸에는 믹스 커피 봉지 껍질과 에너지 드링크 캔이 가득 쌓여 있었다. 김 부장은 잠시 쉬기 위해 탕비실에 들렀다가, 쓰레기통 옆에서 구겨진 커피 믹스 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습관처럼 봉지를 주웠는데, 봉지 안쪽에 연필로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젊은 주니어 컨설턴트의 필체였다.

‘엄마, 나 이번 달 월급 타면 학자금 대출 갚고 20만원 남아요. D-7. 버티자. 내가 하는 일이 낭비는 아닐 거야.’

김 부장은 봉지를 펴들고 한참 동안 그 글씨를 바라봤다. 낭비. 이세아 PM이 김 부장의 방식을 낭비라고 했지만, 이 젊은 친구에게는 **'20만원 남는 월급'**과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한 이 프로젝트의 모든 밤샘이 '낭비가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S/4HANA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삶의 밸런스 시트를 맞추고, 인생의 예산 초과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는 기술자들이었다. 낡은 넥타이를 맨 김 부장이나, 최신 헤드폰을 쓴 젊은 컨설턴트나, 고단한 일상 속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애환은 똑같았다.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세아 PM의 논리도, 최 상무의 예산 압박도, 최 차장의 불만도, 이 커피 믹스 봉지 속의 '진심' 앞에서는 잠시 무의미해졌다.

그는 낡은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맸다. 자신의 개인 예산으로 현업 팀원들에게 따뜻한 저녁을 제공하는 일은, 어쩌면 최고의 프로젝트 관리 전략이었을 것이다.

희생과 결의, 최종 Go-Live를 향해

새벽 1시. 프로젝트 룸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김 부장은 팀원들 앞에 섰다.

“모두들 들어봐. 남은 일주일, D-7이다. 예산은 초과했고, 시간은 부족하다. 이게 현실이야.”

그는 커피 믹스 봉지 속의 메모를 조용히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실패를 수습할 수 있는 기술과, 함께 밤을 새울 수 있는 공감대가 있다. 우리 팀의 **가장 중요한 자산(Asset)**은 S/4HANA 시스템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다.”

김 부장의 진심 어린 말에 팀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산 초과는 내가 책임질게. 너희들은 오직 테스트Go-Live 준비에만 집중해 줘. 우리 같은 기술자들이 마지막에 보여줄 수 있는 건, 시스템의 완벽함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마무리뿐이다.”

이세아 PM은 김 부장을 쳐다봤다. 그녀는 김 부장의 낡은 방식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리더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논리가 아닌 희생이 팀을 하나로 묶었다.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고쳐 매며, 과천 지식정보타운의 희미한 새벽을 바라봤다. 이제는 예산과 시간의 압박을 넘어, 자신이 해온 일들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때였다. 최종 오픈 D-7, 그들은 다시 한번 벼랑 끝을 향해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9장. '기술자'의 의미, 내가 해왔던 일들의 가치

폭풍우 뒤의 고요함

최종 **UAT(인수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의 후유증도 임시 전표와 현업의 뼈를 깎는 데이터 클렌징 작업 덕분에 거의 해소되었다. 프로젝트 팀원들은 비로소 최종 오픈(Go-Live) 하루 전, 과천 지식정보타운 오피스에서 짧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프로젝트 룸은 폭풍우가 지나간 후의 고요함처럼 차분했다. 이세아 PM은 Post-Go-Live Support(오픈 후 지원) 계획 문서를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있었고, 젊은 팀원들은 피곤에 절어 짧은 단잠을 자고 있었다.

김 부장은 옥상 흡연 구역으로 올라갔다.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자,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빛나는 과천 지정타의 야경을 내려다봤다. 수많은 빌딩의 불빛들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저 불빛들 중 자신이 기여한 불빛이 몇 개일까.

그는 문득 자신이 지난 7개월 동안 S/4HANA라는 첨단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정작 자신을 규정하는 단어는 '낡은 넥타이' 혹은 **'꼰대'**였던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김 부장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과연 어떤 기술자인가? 20년 경력의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

그는 20년 전, 처음 R/3 시스템을 도입할 때의 열정을 기억했다. 그때도 현업의 저항은 심했고, 밤샘은 일상이었다. 그 시절의 자신은 단순히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면, 지금의 자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었다.

경험의 가치: 시스템의 뿌리

김 부장은 프로젝트를 회상하며, 자신이 이세아 PM과 달랐던 지점들을 되짚어봤다.

이세아는 S/4HANA최신 논리를 따랐다. 모든 것을 표준화하고, 효율적인 경로로 가려고 했다. 그녀의 방식은 미래였다.

하지만 김 부장이 주장했던 **ABC(활동 기준 원가 계산)**와 같은 구식 로직데이터 수동 검증 방식은, 결국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실패라는 치명적인 위기를 막아내는 열쇠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시스템은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사람이 데이터를 입력하는 방식, 그리고 기업의 관행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야.'

김 부장은 깨달았다. 자신이 20년 동안 쌓아온 경험은, 단순히 낡은 시스템의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데이터를 입력하는 사람들의 심리기업 문화라는 비논리적 요소를 읽어내는 능력이었다.

이세아가 **'효율'**이라는 가지를 보았다면, 김 부장은 **'관행'**이라는 뿌리를 보았던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비로소 견고한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법이었다.

그는 프로젝트 룸으로 내려와 잠든 이세아 PM을 바라봤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논리'**만을 외치는 로봇이 아니었다. 현업의 비논리를 인정하고, 김 부장의 경험적 조언을 수용할 줄 아는 융통성 있는 기술자로 성장해 있었다. 김 부장의 가치는 그녀의 성장을 돕는 '멘토' 역할에서도 발휘된 것이다.

오 사장의 '장인의 정신'

다음 날 아침, 최종 Go-Live 전 마지막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 일상사를 찾았다. 오 사장이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김 부장을 맞이했다.

“부장님. 이제 전쟁이 끝나는군요. 홀가분하시겠습니다.”

“아닙니다, 사장님. 이제 Post-Go-Live Support라는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죠. 근데 사장님, 저는 이제야 제가 해온 일의 가치를 조금 알 것 같아요.”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가리켰다. “이 넥타이처럼요. 낡고 구식이라도, 제게는 이게 20년의 경험입니다. S/4HANA는 세상의 모든 효율을 담고 있지만, 이 낡은 넥타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담지는 못하더군요.”

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피 머신을 가리켰다.

“부장님. 명장(名匠)들이 쓰는 연장은 늘 낡았습니다. 낡았다는 것은 그 연장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함께 겪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쓰는 이 커피 머신이 아무리 좋아도, 제 손맛경험이 없으면 그냥 비싼 쇠붙이일 뿐이죠.”

기술자란, 결국 기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ERP는 광동제약 직원들의 단순한 엑셀 노가다를 덜어주고, 그들이 더 중요한 전략적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죠. 부장님은 그들에게 시간효율이라는 선물을 준 겁니다.”

오 사장은 김 부장의 커피 위에 하트 모양의 거품 아트를 그려주었다.

“당신의 기술이 결국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어요. 그게 바로 기술자의 진정한 가치이자 힐링입니다.”

김 부장은 커피를 마셨다. 쌉싸름함 뒤에 오는 따뜻한 위로. 그는 지난 7개월간의 고단했던 일들이, 헛된 **'낭비'**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심어주는 **'가치 있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남긴 것, 시스템 너머의 가치

김 부장이 프로젝트 룸으로 돌아왔을 때, 현업 담당자인 최동진 차장이 그의 책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 부장님.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최 차장은 평소처럼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묘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부장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현업 팀은 아직도 S/4HANA가 불편하고 싫습니다. 하지만… 부장님이 저희에게 보여주신 책임감인간적인 배려 덕분에, 저희는 이 시스템을 써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최 차장은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부장님이 저희 야근 식사비까지 사비로 내셨잖아요. 저희 팀원들이 십시일반 모았습니다. 작은 금액이지만… 부장님의 인생 밸런스 시트에 **작은 차변(Debit)**이라도 넣고 싶어서요. 부장님이 저희에게 주신 공감과 희생이라는 **가치(Credit)**는, 이 돈으로 절대 다 갚을 수 없을 겁니다.”

김 부장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돈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최 차장의 진심 어린 감사는, 예산 초과분을 메우는 그 어떤 돈보다 소중했다.

“최 차장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돌려주십시오. 제가 드린 건 기술자로서의 책임감입니다. 그리고… 새 시스템을 잘 써주시는 것, 그것이 제게 주시는 가장 큰 보답입니다.”

그는 최 차장의 메모를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완벽하게 채워져 있었다.

김 부장은 자신이 광동제약에 남긴 것이 단순히 S/4HANA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낡은 경험인간적인 공감, 그리고 희생적인 리더십이었다. 이는 기술적 성공을 넘어선, 인생의 승리였다.

그는 자신의 노트북을 덮었다. 기술자란, 화려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세상에 나올 때 발생하는 모든 비논리적인 오류인간적인 갈등을 책임지고 해결하며, 결국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장인이었다.

김 부장의 낡은 넥타이는 더 이상 구식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20년 경력의 훈장이자, 인간적인 기술자의 자부심이었다.

최종 오픈 D-Day. 김 부장은 새로운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인생 밸런스 시트도 완벽하게 맞춰가고 있었다.


10장. 광동제약 프로젝트를 마치고: 다음 출근길

Go-Live! 기술자의 조용한 평화

프로젝트 최종 오픈, Go-Live D+1 새벽 0시 1분. 시스템은 무사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프로젝트 룸에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세아 PM은 젊은 팀원들과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고, 현업 대표로 남아있던 최 차장도 안도감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김 부장은 조용했다. 그는 자신의 모니터에 뜬 S/4HANA의 메인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은 마치 모든 고난을 이겨낸 것처럼 깨끗하고 완벽한 모습이었다.

“성공입니다, 부장님! 시스템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이세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 부장에게 달려왔다.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수고했다, 이 PM. 하지만 기술자의 성공은 Go-Live 순간이 아니라, 시스템이 고요하게 돌아가는 순간이지.”

김 부장에게 Go-Live 순간의 환호는 일종의 소음이었다. 진정한 힐링은 시스템이 아무 일 없이, 아무도 모르게, 정확하게 작동하는 순간에 오는 조용한 평화였다. 7개월 동안 밤샘하며 싸웠던 모든 기술적 문제와 인간적 갈등이, 지금 이 순간, 완벽한 효율이라는 결과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트랜잭션과 마지막 에러

Go-Live 후 첫 주. Post-Go-Live Support 기간 중이었다. 모두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지만, 시스템은 놀랍도록 안정적이었다. 김 부장이 이세아의 논리를 수용하고, 이세아가 김 부장의 경험을 존중한 결과였다. 경험과 효율이 완벽하게 융합된 시스템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에러는 늘 찾아오는 법이었다. 오픈 후 3일째. 아침 9시, 프로젝트 룸에 비상이 걸렸다.

“부장님! 재고 자산(Inventory) 이동 Transaction에서 오류가 났어요! Movement Type이 잘못 정의됐다고 뜨는데요!” 젊은 팀원이 소리쳤다.

현업 담당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최 차장의 얼굴이 다시 잿빛이 되기 직전이었다.

김 부장은 평소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모니터로 다가갔다.

“괜찮아. 재고 이동이냐. 그거 아마 구 시스템에서 쓰던 임시 Movement Type 코드가 S/4HANA의 새로운 **Valuation Class(평가 등급)**랑 충돌해서 그럴 거야.”

김 부장은 단번에 문제의 근본을 짚어냈다. 20년 동안 수많은 기업의 비논리적인 관행을 접해본 그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그는 ABAP 개발자에게 해당 Movement Type의 로직을 수정하는 대신, 현업에게 표준 Movement Type을 사용하도록 업무 프로세스를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시스템은 완벽해. 우리가 사람들의 업무 관행을 시스템에 맞춰야 해. 최 차장님, 현업 분들에게 이 기회에 표준 프로세스로 완전히 넘어가도록 지도해 주십시오.”

김 부장의 여유로운 대처는 현업과 팀원들에게 큰 신뢰를 주었다. 기술자란, 에러가 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에러가 발생했을 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임을 모두가 깨달았다.

세대를 잇는 기술자의 유산

Post-Go-Live Support 기간이 끝나고, 프로젝트 팀이 철수하는 날이 왔다. 7개월간 함께 고생했던 팀원들과의 작별은 뭉클했다.

이세아 PM이 김 부장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눈빛은 더 이상 날카롭지 않고, 깊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장님. 7개월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부장님 덕분에 저는 S/4HANA의 논리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의 사람이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를 배웠습니다. 저는 부장님처럼 경험을 존중하는 PM이 되고 싶어요.”

“고맙다, 이 PM. 너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기술자가 될 거야. 너의 효율과 나의 경험이 합쳐졌으니, 네 다음 프로젝트는 완벽할 거다. 그리고… 너의 기술 부채를 갚아나가는 과정이, 너의 인생 자산이 될 거다.”

김 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세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김 부장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들의 세대 갈등은 가장 아름다운 성장과 공감의 서사로 마무리되었다.

최동진 차장도 김 부장을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광동제약의 유명한 비타민 음료 한 박스가 들려 있었다.

“김 부장님. 저희 회사에 효율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부장님이 저희에게 보여주신 인간적인 희생은 저희 팀원 모두에게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이 시스템을 더 이상 **'컨설턴트들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 부장은 최 차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시스템의 성공은 곧 사람들의 성공이라는 것을 그는 확인했다.

카페 일상사의 '졸업 선물'

프로젝트 룸의 모든 짐을 정리하고, 김 부장은 마지막으로 카페 일상사를 찾았다.

“오 사장님. 이제 저도 이 과천 지정타 프로젝트를 마쳤습니다. 7개월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장님. 김 부장님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당신의 인생까지 고도화해서 돌아가는군요.”

오 사장은 김 부장의 낡은 넥타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 넥타이에서는 피로와 구식의 냄새가 아니라, 경험과 지혜의 향기가 났다.

오 사장은 김 부장에게 카드를 하나 건넸다.

“이건 저의 졸업 선물입니다. 김 부장님. 코코넛 라떼 쿠폰 10장입니다. 다음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에 꼭 다 쓰세요. 당신의 효율적인 기술 뒤에 숨겨진 비효율적인 달콤함을 잊지 마시라는 의미입니다.”

김 부장은 웃었다. 코코넛 라떼. 이세아 PM이 좋아했고, 그가 한때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던 그 달콤함. 이제 그는 그 비효율이 주는 삶의 위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잊지 않겠습니다.”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 넥타이는 이제 과천 지식정보타운에서 얻은 힐링과 성장의 훈장이었다.

다시, 나만의 자리로

김 부장은 7개월 만에 과천 지정타를 벗어났다. 차를 몰고 나가는 길. 그는 꽉 막힌 출퇴근길이 아니라, 한가로운 주말 아침 같은 여유를 느꼈다.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세대의 동료들. 하지만 이제 그는 두렵지 않았다.

기술자는 단순히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었다.

김 부장은 룸미러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피곤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그는 핸들을 잡고, 자신의 다음 출근길을 향해 나섰다.

낡은 넥타이와 함께, 완전히 새로워진 마음가짐으로.

그의 인생 ERP는 이제 Go-Live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에필로그: 다시, 나만의 자리로

낡은 넥타이의 안식

광동제약 프로젝트를 마친 지 일주일 후. 김 부장의 서랍 속, 수많은 넥타이 사이에서 가장 낡고 해진 체크무늬 넥타이가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7개월 동안 김 부장의 기술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했던 그 넥타이는, 이제 과천 지식정보타운에서의 고군분투를 증명하는 훈장처럼 보였다.

그날 아침, 김 부장은 낡은 넥타이 대신, 딸 민지가 졸업 선물로 사준 짙은 네이비색 스웨터를 입고 집을 나섰다. 넥타이의 뻣뻣한 규율 대신, 스웨터의 부드러운 유연함이 그의 하루를 감쌌다.

출근길은 여전히 복잡했다. 꽉 막힌 올림픽대로와 끊임없이 울리는 경적 소리. 과천으로 향하던 출근길보다 나아진 것은 없었지만, 김 부장의 마음은 완전히 달랐다.

7개월 전, 그는 이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자신의 낡은 경험쓸모없는 짐이 될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알았다. 고단한 일상은 ERP 시스템처럼 완벽하게 효율화될 수 없으며, 그 속에서 가치를 찾는 것이 바로 인생의 기술이라는 것을.

그는 운전대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인생 밸런스 시트는 여전히 차변대변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는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살아있는 시스템의 증거임을 받아들였다.

밸런스, 코코넛 라떼와 함께

가장 큰 변화는 가족 시스템에서 일어났다.

그날 아침, 김 부장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습관처럼 믹스 커피를 마시는 대신, 카페 일상사에서 얻어온 쿠폰을 사용했다. 그는 딸 민지와 약속한 대로 코코넛 라떼를 마시며 화상 통화를 했다.

“아빠, 코코넛 라떼 맛 어때? 이게 바로 비효율의 달콤함이야.” 딸 민지가 웃으며 말했다.

“음… 맛있네. 확실히 믹스 커피보다는 **UX(사용자 경험)**가 좋군.” 김 부장은 여전히 기술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 톤은 훨씬 따뜻하고 유머러스했다.

그는 이제 가족과의 시간을 더 이상 **업무의 방해 요소(Impediment)**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가장 중요한 에너지 충전(Resource Allocation)**이자, **인생의 가치를 재평가(Revaluation)**하는 시간이었다.

아내와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주말 저녁, 아내는 김 부장에게 말했다. “당신 요즘은 좀 사람 같아. 이제야 우리 집에 Log-in 한 기분이야.”

“하하. 여보. 내가 그동안 시스템에 갇혀 있었나 봐. 이제 내 인생 시스템은 표준 프로세스를 따를 거야. 주말은 가족과의 시간으로 Hard-Coding 했어.”

김 부장은 더 이상 야근 수당 대신 사비로 현업을 챙겨주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 인간적인 투자 덕분에, 그는 가족과의 잃어버린 신뢰라는 **가장 중요한 자산(Asset)**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낡은 넥타이, 새로운 기술자

점심시간. 김 부장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잠깐 들른 강남의 오피스 건물 탕비실에서 믹스 커피를 뽑았다. 낡은 넥타이 대신 스웨터를 입은 김 부장은, 이제 젊은 팀원들 사이에서 겉돌지 않았다. 그는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네들.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할 때, 현업의 비논리적인 관행을 꼭 먼저 파악하게. 아무리 최신 시스템이라도, 결국 사람들이 쓰는 방식을 이기는 건 없어.”

그의 조언은 경험과 지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꼰대가 아니었다. 낡은 넥타이를 벗고, 세대와 세대, 구식과 신식을 잇는 새로운 유형의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과천지식정보타운에서의 7개월은 그에게 일종의 ERP 고도화 프로젝트였다. 기업의 시스템을 S/4HANA로 바꿨듯, 그는 자신의 인생 시스템경험과 공감이 융합된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기술자란, 결국 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힐링하는 사람이었다.

에필로그: 다시, 출근길 위에서

오후 늦게, 김 부장은 자신의 다음 행선지를 향해 다시 차를 몰았다. 꽉 막힌 도로 위. 그는 창문을 열고, 도시의 소음과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핸드폰에는 이세아 PM이 보낸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From. 이 PM] 부장님. 광동제약 팀에서 감사 편지가 왔어요. '김 부장님의 기술과 인간미 덕분에 시스템이 영구적으로 안정화되었습니다' 라고요. 정말 부장님은 최고의 기술자세요.

김 부장은 문자 메시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영구적으로 안정화. 그것이야말로 그가 바랐던 완벽한 문장이었다.

그는 룸미러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낡은 넥타이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경험이 주는 단단함힐링이 주는 여유가 가득했다.

김 부장은 엑셀을 밟았다.

고단한 일상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과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음 출근길도, 그의 인생 시스템도, 이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과천지식정보타운의 기술자들은, 그렇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또 다른 삶의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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